벼 한 톨의 무게

1990년대 초 · 독정 정미소

벼 한 톨의 무게 ​

수채화로 그린 농민의 손에 담긴 벼 한 줌

믿었던 대형 곡물 상회가 어음 3억 원을 부도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연쇄 부도가 터지며 손에 쥔 수표들은 줄줄이 휴지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사이 도둑들이 창고 벽을 뚫고 쌀 수백 가마를 훔쳐 갔다. 서울로 쌀을 싣고 간 배달 트럭마저 통째로 도둑맞았다.

정미소 마당에는 흙 묻은 장화를 신은 동네 농민들이 말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한 해 농사지은 볏값을 떼일까 봐 애태우는 이웃들의 굳은 얼굴이 배병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정미소 문을 닫고 법대로 파산 신청을 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손을 털거나 밤사이 달아나는 이들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배병희는 안방 장롱 깊숙한 곳에서 손때 묻은 누런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에는 안면도 갯벌을 떠나와 남양만 간척지에서 피땀 흘려 일군 농토의 땅문서가 들어 있었다.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농사지은 사람 볏값은 밀려선 안 된다.”

남들은 미련한 짓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그에게는 벼 한 톨에 깃든 이웃의 땀과 생계를 지키는 일이 마땅한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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