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속 볏가마 사수작전

1980년대 · 독정 정미소

장대비 속 볏가마 사수작전 ​

수채화로 그린 장대비 속에서 손전등으로 야적 가마니를 살피는 배병희

새마을정미소 문을 다시 연 배병희는 멈춰 선 기계부터 하나씩 뜯어고쳤다. 낡아 헛돌던 베어링을 갈아 끼우고 풀리에 엉겨 붙은 기름때를 닦아내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과거 안면도 탈곡팀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든든한 동지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사촌과 고향 동료, 그리고 디젤 엔진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났던 기관수가 힘을 보탰다.

배병희는 기관수에게 정미소의 심장인 발동기 관리를 도맡겼다. 크랭크 손잡이를 힘껏 젖혀 50마력 조양 발동기에 시동을 걸면, 묵직한 굉음과 함께 매캐한 경유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쇠 회전축이 힘차게 돌아갔다.

농사와 방앗간 일을 함께 꾸려가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남양만 간척지의 드넓은 논에 매달려 흙과 소금기를 다스렸다. 추수를 마친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밤낮없이 벼를 찧었다.

벼를 다 찧고 난 뒤에도 쉴 틈은 없었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틈틈이 기계를 모조리 뜯어내 닳아빠진 부속을 깎고 갈아 끼웠다.

농사로 번 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정미소 기계를 손보고 부품을 장만하는 데 모두 쏟아부었다.

일손이 달리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어린 자녀들도 나섰다. 뽀얀 쌀겨와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제 몸집만 한 볏가마니와 쌀 포대를 어깨에 메고 날라 쌓았다.


수채화로 그린 벼를 맡기러 몰려드는 농민과 볏가마가 쌓이는 초기 정미소 마당

정미소가 다시 돌아가고 약속한 날에 볏값을 꼬박꼬박 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독정리는 물론 장안면 일대의 농가들까지 벼를 싣고 몰려들었다.

훗날 정미소에 전기를 들이고 나서는 곡식 쌓아 둘 자리가 늘 모자랐다. 쏟아져 들어오는 벼를 다 들여놓을 만한 번듯한 창고가 없었다.

배병희는 고육지책으로 정미소 옆 논을 빌렸다. 거친 논바닥 위에 볏가마니를 수천 가마씩 집채만 한 높이로 쌓아 올렸다. 그 위에 두꺼운 천막과 비닐 방수포를 덮어두었다.

하지만 창고도 없이 들판에 나락을 쌓아두는 일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바닥에서는 들쥐들이 가마니 밑을 갉아 벼가 쏟아지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적은 비였다. 방수포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기라도 하면 가마니 속에서 열이 나며 벼가 하얗게 뜨고 썩어버렸다. 곰팡이가 피거나 싹이 트면 농민들의 한 해 농사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추수철 내내 배병희는 밤하늘에 구름만 보여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가 올까 두려워 흙 묻은 작업복에 장화도 벗지 못한 채 밤을 새웠다.

먹구름이 몰려와 한밤중에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하면, 그는 지체 없이 큼지막한 손전등을 집어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 야적장으로 내달렸다.

세찬 비바람에 거대한 방수포가 펄럭이며 날아가려 하면, 미끄러운 볏가마 위로 기어 올라갔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모래주머니와 흙포대를 눌러 얹고 굵은 밧줄로 방수포를 단단히 동여맸다.

논바닥에 차오른 흙탕물이 볏가마 밑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삽을 쥐고 장대비 속에서 진흙을 퍼내며 야적장 둘레로 깊은 물길을 텄다.

비가 잦아들 때까지 손전등을 비춰 가며 빗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천막 구석이 젖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렇게 밤새 볏가마 곁을 지켰다.

“남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요. 내 쌀은 버릴망정 남의 나락은 단 한 톨도 축나게 해선 안 되오.”

그렇게 빗속에서 지켜 낸 볏가마니 위로 농민들의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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