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가는 버스

열여덟 평 독정리 집은 식구들과 가축들로 늘 북적였다. 배병희는 간척지 농사로 쉴 틈이 없는 와중에도 마당 한쪽에 우리를 치고 소와 닭, 토끼를 길렀다.
아내는 거친 갯바람이 부는 낯선 터전에서도 마당 한구석에 꽃밭을 일구며 살림을 정성스레 가꾸었다.
집안에서 배병희는 말수가 적고 엄한 편이었다. 그는 평소 단정한 몸가짐과 예절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무리 일손이 바빠도 아이들 머리가 조금만 자라면 마당에 앉혀두고 손수 깎아주었다. 가위로 짧고 단정하게 다듬은 뒤 머리를 감겨주었다. 감기라도 들세라 드라이어로 말려주곤 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어렵고 무뚝뚝했다. 하지만 말이 없을 뿐 속은 세심했다. 자녀가 실수로 귀한 선풍기 날개를 부러뜨려 겁을 먹었을 때도 불호령은 없었다.
“고치면 된다.”
그는 담담한 한마디로 아이를 다독였다.
초등학생 자녀가 심하게 앓아누웠을 때는 일을 그대로 놓고 아이를 차에 태워 읍내 병원으로 내달렸다. 밤늦도록 곁을 지키며 치료를 받게 한 뒤에야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독정리 간척지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배병희는 자녀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어린 시절 험한 산길과 가난 탓에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자식들만큼은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마음껏 배우기를 바랐다.
간척지에서 피땀 흘려 거둔 돈이었지만, 자녀들의 학비와 책값만큼은 한 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수원으로 진학한 자녀들을 위해 학교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학비와 하숙비를 대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옷 한 벌 허투루 사는 법이 없었다. 지독할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수원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던 딸은 주말이면 집에 다녀갔다. 돌아갈 때마다 아내는 정성껏 담근 깍두기를 새지 않게 꽁꽁 싸매 들려주었다. 신작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나가는 딸의 등 뒤로는 늘 애틋한 당부가 따라붙었다.
“덜컹거리는 길에서 다칠라, 차를 타면 꼭 가운데 자리에 앉거라. 그리고 차비는 주머니 깊숙이 잘 넣어두고.”
깍두기 통을 품에 안고 길을 나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배병희는 다시 흙투성이 들판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