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한 톨의 무게 ​

수채화로 그린 농민의 손에 담긴 벼 한 줌

믿었던 대형 곡물 상회가 3억 원을 부도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연쇄 부도가 이어졌다. 받아 둔 약속어음과 가계수표가 줄줄이 휴지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밤사이 도둑들이 창고 벽을 뚫고 쌀 백여 가마를 훔쳐 갔다. 서울로 쌀을 싣고 간 트럭마저 통째로 도둑맞았다.

정미소 마당에는 흙 묻은 장화를 신은 농민들이 말없이 서성였다. 한 해 농사지은 볏값을 떼일까 봐 애태우고 있었다.

남들처럼 정미소 문을 닫으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다들 그렇게 손을 털고 야반도주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배병희는 안방 장롱 깊숙한 곳에서 누런 봉투를 꺼냈다. 안면도를 떠나와 남양만 간척지에서 피땀 흘려 일군 농토의 땅문서였다.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농사지은 사람 볏값은 밀려선 안 된다.”

남들은 미련한 짓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벼 한 톨에 깃든 이웃의 땀과 생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에게는 마땅한 도리였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다.

가장 힘겨운 순간에도 끝내 사람을 먼저 품었던 한 사람의 우직하고 따뜻한 생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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