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땅문서 ​

수채화로 그린 볏값을 마련하려고 장롱에서 땅문서 봉투를 꺼내는 배병희

정미소는 거래처에서 쌀값을 받지 못했지만, 농민들에게 치러야 할 볏값은 남아 있었다.

볏값을 마련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땅을 내놓는 것이었다.

1977년 안면도를 떠나와 일군 6만 평(20정보)의 옥토였다.

하지만 그 땅은 이미 조금씩 줄어 있었다. 1983년 정미소를 인수할 때 논 일부를 팔았고, 전봇대를 세워 전기를 끌어올 때도, 창고를 짓고 진입로를 닦을 때도 팔았다.

한 뼘 한 뼘 소금기를 빼 가며 제 손으로 일군 논이었다.

배병희는 안방 장롱 깊숙한 곳에서 누런 땅문서 봉투를 꺼냈다.

최소한의 논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팔기로 했다.

농가와 약속한 날짜를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제값을 따질 겨를도 없이 헐값에라도 논을 넘겼다.

그렇게 마련한 현금 다발이 정미소 사무실 책상 위에 쌓였다. 약속한 날, 배병희는 농민들을 정미소로 불러 모았다.


수채화로 그린 수매 장부를 펼쳐 농민에게 현금으로 볏값 전액을 지급하는 배병희

배병희는 수매 장부를 펼쳐 놓고 농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볏값은 한 푼도 깎지 않고 빳빳한 현금으로 쥐여 주었다. 어음도 외상 전표도 아니었다.

볏값을 떼일까 봐 밤잠을 설치던 농민들은 눈앞의 돈다발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배 사장, 정말 이 돈을 다 준단 말이오? 논까지 팔았다더만….”

거친 손으로 지폐를 받아 든 늙은 농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병희는 농민들의 손을 꼭 쥐며 나직이 말했다.

“약속한 돈인데 당연히 드려야지요. 믿고 기다려 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빚더미 속에서 제 논까지 팔고 나니 그에게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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