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지킨 사람 ​

수채화로 그린 가마솥 밥을 떠서 일꾼들의 그릇에 담는 아내의 손

정미소가 독정리 들판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안살림을 도맡은 아내의 몫이 컸다.

배병희가 새마을정미소를 맡겠다고 했을 때 말린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는 무엇보다 맏아들이 걱정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친 아들이었다. 정미소를 맡으면 그 아들이 볏가마니 사이에서 몸이 상하도록 일하게 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남편의 결심은 굳었고 농민들의 부탁도 간곡했다. 아내는 끝내 반대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앞치마를 고쳐 맸다.


수채화로 그린 비좁은 집에서 병든 배병희의 어머니를 돌보며 이불을 여미는 아내

정미소를 시작하기 전부터 아내의 하루는 빈틈이 없었다. 열여덟 평 시멘트 기와집은 식솔들로 늘 비좁았다.

안면도에서 모시고 온 배병희의 노모는 기력이 쇠해 자리에 누웠다. 아내는 노모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병구완을 도맡았다.

홀로 지내다 함께 건너온 이웃 어르신의 잠자리와 밥상도 한 식구처럼 챙겼다. 여기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끼니와 빨래가 겹쳤다. 아내의 하루는 동트기 전에 시작해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정미소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부엌도 쉴 새 없는 일터가 되었다. 추수철부터 이듬해 봄까지 마당에는 볏가마니를 실은 경운기와 소달구지, 트럭이 꼬리를 물었다.

발동기를 다루는 기관수와 도정 일꾼들, 멀리서 곡식을 맡기러 온 농민들로 마당은 종일 북적였다.

아내는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굵은 장작을 때며 무쇠 가마솥에 고봉밥을 지었다. 큰 솥 가득 장국과 찌개를 끓여 하루 서너 차례씩 밥상을 차렸다.

쌀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일꾼들에게는 구수한 숭늉을 쉬지 않고 날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마다 따끈한 보리차와 커피를 내놓았다. 배병희는 늘 이렇게 일렀다.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대접하라.”

그 당부를 날마다 지켜 낸 것은 아내의 손이었다.

춘궁기나 끼니때면 정미소 뒤편을 서성이는 이웃들이 있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아내는 그들을 조용히 곳간으로 데려갔다. 쌀독에서 바가지 가득 쌀을 퍼 보자기에 꽁꽁 쌌다. 그러고는 남모르게 쥐여 보냈다.

자녀들에게는 입버릇처럼 타일렀다.

“남에게 모질게 굴지 마라. 어디를 가든 세상에 쓸데없는 원한을 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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