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가는 정미소를 사다

1980년대 초 독정리 들판 한구석에는 ‘새마을정미소’라는 조그마한 방앗간이 있었다. 간척지 농민들이 피땀 흘려 거둔 가을 벼를 찧어 양식을 마련하던 곳이었다. 남은 쌀을 팔아 자식 학비를 대고 묵은 빚을 갚던 동네의 소중한 일터였다.
당시 농민들은 벼를 맡겨 쌀을 찧은 뒤, 집에서 먹을 양식을 뺀 나머지를 정미소를 거쳐 곡물상에 팔았다. 볏값은 나중에 건네받곤 했다.
그러나 정미소를 운영하던 전 주인이 곡물 상인들에게 외상값을 떼이면서 부도 위기에 몰렸다. 농민들에게 줄 볏값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장날 지나면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한 해 농사의 결실이자 생계의 전부를 떼일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극에 달했다.
“저러다 야반도주라도 하면 우리는 다 굶어 죽는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정미소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다.

절박해진 독정리 농민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배병희를 찾아갔다.
“배 사장, 배 사장이 이 정미소를 맡아주지 않으면 우리 농민들은 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소. 제발 이 정미소 좀 맡아 살려주시오. 배 사장이 맡아준다면 우리가 두말없이 벼를 다 맡기고 앞장서서 돕겠소.”
농민들은 1977년 그가 이주해 온 뒤로 6만 평 농사를 지으면서 품삯 한 푼 떼먹지 않는 모습을 똑똑히 보아왔다. 안면도 시절부터 김 사업과 이동식 탈곡팀을 이끌어 온 수완과 손재주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가족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소금기 밴 간척지 6만 평 일구느라 온 식구 뼈가 녹아날 지경인데, 남이 망쳐놓은 빚더미 방앗간을 왜 우리가 떠안습니까? 잘못 손댔다가 이 고생해서 일군 논밭까지 남의 빚 갚는 데 다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가족들은 배병희는 물론 어린 아들들까지 정미소에 매여 볏가마니에 치이며 고생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배병희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는 슬하에 5남 2녀를 둔 가장이었다. 논농사만으로는 자식들 뒷바라지가 벅찼다.
땀 흘려 지은 벼를 제값에 팔아 현금을 쥐어야 살림이 일어서고 밑천도 모을 수 있었다. 농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쌀을 직접 찧고 내다 파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고, 배병희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배병희는 청년 시절부터 익힌 기계 다루는 솜씨와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믿었다.
무엇보다 어려움에 빠져 자신을 찾아온 농민들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농사지은 사람의 볏값을 떼어먹지 않고 정직하게 셈을 치르면 정미소도 반드시 바로 세울 수 있다. 신용만 지키면 길은 열린다.”
배병희는 결국 자신이 일군 6만 평 농지 가운데 일부를 팔기로 했다. 그 돈으로 밀린 빚을 정리하고 인수 대금을 치러, 1983년 10월 새마을정미소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굳게 닫혔던 방앗간 문을 열고 들어선 첫날 마주한 광경은 참담했다. 낡은 함석지붕은 곳곳에서 비가 샜다. 기름때와 먼지에 뒤덮인 채 멈춰 선 기계들은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었다.
부도난 정미소를 살려내는 일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이나 험난한 또 하나의 싸움이었다.